150723 木 : 영화, 암살 Assassination, 2015 책과 영화의 숲



최동훈 감독,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오달수, 조진웅 주연, 조승우, 최덕문, 이경영, 박병은 출연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스포일러 있습니다)

1933년. 김구와 김원봉은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의 암살을 계획한다. 작전을 수행할 3명의 요원은 안옥윤(전지현), 속사포(조진웅), 황덕삼(최덕문). 김구는 염석진(이정재) 대장을 통해 이들에게 작전 계획을 하달한다. 안옥윤을 대장으로 한 3인의 암살단은 경성으로 향한다. 한편 김구를 배신하고 일본군의 밀정으로 돌아선 염석진은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에게 도리어 3명의 암살을 부탁한다.

라인업에 오른 영화들 중에 유일하게 손꼽아 개봉을 기다렸던 영화. 독립군의 이야기는 나에겐 언제나 가장 듣고싶고, 또 보고싶은 이야기이니까. 개봉 첫날 도저히 시간을 뺄 수 없어서 못 보고, 둘째날 밤에 혼자 가서 봤다. 앞으로 최소한 두번 이상은 더 볼 예정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세번 까지도. 

최동훈 감독은 내 생각에 현재 세계에서 케이퍼무비(범죄 영화의 서브장르, 주로 도둑들이 멤버를 모와 모의를 하고 거하게 한탕 하는 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감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션스 일레븐'(2002) 보다 '도둑들'(2012)이 열배는 더 재밌고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지어 '도둑들'은 최동훈 감독의 베스트가 아니다. 이런 출중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뜻깊은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의 그 기대감은 정말 컸다. 그의 재능이 그저 재미난 장르 영화와 오락 영화로 다소 평가절하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 아쉬웠다. '범죄의 재구성'(2004)은 내가 본 최고의 케이퍼 무비이며, 불과 2년 뒤에 들고나온 '타짜'(2006)는 거의 한국 영화의 베스트 10에 꼽을 만큼 훌륭한 영화였으니까.   

독립군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는 '아나키스트'(2000) 이후 정말 오랜만이 아닌가 싶다. '암살'과 비슷한 시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2008)와, '원스 어폰어 타임'(2008)이 있지만 '암살'만큼 독립군의 활약상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가져왔을 뿐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조금씩 달랐다. 두 영화는 장르적으로도 각각 멜로와 코미디에 가깝다. '암살'은 물론 픽션이다. 다만 김구와 김원봉 등 실존인물이 등장하고, 당시 충분히 있었음직한 사건을 다룸으로써 좀더 설득력을 얻고,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암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웅장하면서도 디테일한 세트였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했다. 지금껏 한국 영화에서 본 가장 압도적인 세트였다고나 할까. 완벽에 가까운,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재현된 세트 위에서, 시나리오를 가장 재밌게 쓰기로 유명한 최동훈 감독의 이야기가,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라는 명배우들을 통해 펼쳐졌다. 2시간이 넘는(139분) 상영시간은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만 영화는 기대 이상도 기대 이하도 아니었다. 기대가 워낙 컸던 걸 감안하면 꽤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반의 스쳐지나가는 듯 내뱉은 대사 하나 하나들이 중반의 새로운 국면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는 정말 감탄했다. 특히 안옥윤의 이야기는 사연부터 대사 하나하나 까지가 다 인상적이었다. 다만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아무래도 소재 자체가 주는 무게에 영화가 좀 짓눌린 듯한 느낌은 있었다. '범죄의 재구성'(2004)이나 '도둑들'(2012) 만큼의 재기발랄함은 없었다. '가이 리치' 감독의 초기작들 처럼 인물간의 얽히고 섥히며 벌어지는 기발한 상황들을 기대했던 내게는 뒤로 갈수록 단조로워지는 이야기 구조가 조금 불만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최동훈 감독의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에필로그 부분이 아닌가 싶다. 해방 후 안옥윤과 염석진이 다시 만나는 장면. 나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에서 죽은줄 알았던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이 셀레나 카일(앤 헤서웨이)과 카페에서 만나는 장면처럼, 안옥윤과 하와이 피스톨이 미라보 호텔에서 다시 만나는 결말을 예상했다. 만약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면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최동훈 감독은 훨씬 진지하고 묵직한 방식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암살'은 첫장면 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이야기가 꽉 채워진 느낌이다. 쉬어갈 틈이 없다. 영화 3편 정도의 이야기를 한편에 담은 것 같다. 그래서 편집이 거칠다. scene 하나 하나를 뜯어놓고 보면 마치 박찬욱 감독의 미장센을 보는 듯 장인 정신이 느껴질 정도다. 대사 하나하나는 또 어떤가. 주옥같은 대사와 기발한 상황이 만들어낸 유머들이 쉴새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정해진 러닝타임에 보여줘야 할 이야기가 워낙 많다보니, 빠른 편집은 관객에게 영화 속의 순간들을 음미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숨이 가쁘다.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메시지가 머릿 속에서 잘 정리되지 않는 면이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암살'은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가 잘 되서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더 많이 제작되기를 희망한다. '암살'은 걸작은 아니다. 그러나 매우 잘만든, 그리도 뜻깊은 상업영화다. 다만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를 뛰어넘는 최동훈 감독의 베스트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최동훈 감독의 다음 작품을 다시 손꼽아 기다린다. 

-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 가장 떠오르는 장면은 아네모네 마담(김해숙)이 염석진에 체포되기 직전 순간적으로 자살을 결심하는 장면이다. 담배를 쥔 손의 격렬한 떨림. 속사포와의 마지막 짧은 통화. 그리고 한발의 총성. 그 순간 김해숙이라는 大배우가 보여주는 연기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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